[연대기] 사건, 그 후 (Post Mortem)

2007.07.20 11:44

pissup 조회 수:3850 추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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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그 후

샤워기에서 나온 따뜻한 물이 쪼그려 앉은 몸 위에 뿌려졌다. 흐르는 물줄기가 얼굴을 타고 흘러들어가 옷을 적셨다. 몸을 앞뒤로 까딱까딱 흔들며 등을 차가운 금속 벽에 대고 식혔다가 다시 샤워기의 물로 따뜻하게 했다.

온몸을 흐르는 여러 가지 감각 중에 으뜸은 피곤함이었다. 그 피곤함이 지난밤 그 일로 생긴 식은땀 나는 후유증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탄광촌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일상적인 정신적 피로 때문인지는 몰랐다. 모든 걸 씻어내려 가면서 지금 그 자리에 영원히 쪼그려 앉아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 달라붙어 버린 옷가지들이 점점 성가시게 했다. 그 여자는 일어서 옷가지를 벗어 서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내던져버렸다. 일어선 채 아래를 살짝 내려다보았다. 옷더미에서 빠져나온 혈흔이 덩굴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하수구로 모여 흘러내려 가는 모습을 보았다. 여자는 한숨을 쉬고 손가락을 머리카락 틈에 찔러넣고 빗어 내렸다.

시끄러운 소리가 어딘가 먼 곳, 멀리서 들려왔다. 눈을 감고 얼굴을 들어 올려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에 대면서 그 소리를 무시했다.

소리는 계속되었다. 유리병 속에 갇혀 윙윙거리면서 벽에 부딪혀대는 파리 소리 같았다. 아티라(Atira)가 관자놀이 부근을 문질렀다. 그 소리는 문 두드리는 똑똑 소리에 묻혔다. 처음에는 부드럽다가 이내 거세졌다.

"알았어, 그만,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졌어!" 아티라가 말했다. 아티라는 샤워기를 끄고 머리카락의 물기를 짜내며 수건을 집어들 생각도 없이 살금살금 욕실 밖으로 나와 문쪽으로 향했다. 문에 나 있는 방문자 확인 구멍으로 살짝 밖을 내다본 후, 문을 열었다.

그 자리엔 동료인 칼렙(Caleb)이 서 있었다. 칼렙과 아티라는 탄광촌의 관할 경찰로 일하던 경찰관이었고 두 사람의 동료애가 상황을 이토록 모질게 내몰고 갔다. 이런 직업을 계속해서 유지하려면 특이한 사람이어야 했다. 대개는 잔혹한 탈을 쓴 이곳에서만 적용되는 정의에 대해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령을 터득할 때까지 자신을 뒷받침해 줄 또 다른 특이한 사람도 있어야 했다.

칼렙은 아티라의 몸을 내려다봤다가 다시 시선을 올려 눈을 바라보았다. 칼렙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놀라움이나 흥미로움 역시 보이지 않았다. 경찰관으로서의 동료애에 다른 것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왜?" 아티라가 말했다.

"넌 아무 이상한 짓 안 했다는 걸 확실히 할 수 있겠어."

"이를테면?"

"증거들을 계속 곳곳에 뿌려 둬. 이야기를 계속 꾸며대면 곧이곧대로 들어주지 않게 될 거야. 나한테만 얘기해." 칼렙이 멈칫했다. "바닥에 물 떨어진다."

아티라가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툴툴거리며 욕실로 다시 들어갔다. 아티라는 칼렙이 문 닫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칼렙은 아티라를 따라 욕실로 들어왔다. 아주 잠깐 아티라는 이 모든 상황에 울컥 신경질이 솟구쳐옴을 느꼈다. 이번에는 칼렙이 아티라를 훔쳐보지 않았고 대신 조용히 샤워기로 다가가 물을 잠그고 바닥에 쌓인 옷가지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거 좀 빨아야겠어." 아티라가 말했다.

"그래야겠네. 입은 채로 빨 수는 없잖아. 그랬다가는 그 피 죄다 뒤집어쓰게 될걸." 칼렙이 말했다.

"어이, 대놓고 소리지르지 마. 진정해."

"시체는 어딨어?"

아티라는 칼렙에게 걸어가 그 앞에 서서 허리춤에 손을 얹고 말했다. "이봐! 너 날 믿는 거야 안 믿는 거야?"

"이건 믿고 안 믿고가 문제가 아니야. 그리고 너도 그런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어. 이건 전문가다운 기질에 대한 문제야. 우린 이미 저질렀고, 우린 스스로 뒷정리를 해야 해. 안 그러면 곤란해."

"나도 다 알고 있어. 난 그저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을 뿐이야. 난 너처럼 기계 덩어리가 아니야." 아티라가 반쯤은 좌절한 목소리로, 반쯤은 존경스러워하기 아까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칼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시체 처리는 해 뒀지?"

"응, 소각장에. 역도 선수로 돌아간 것 같아서 기뻐. 엄청나게 무겁더라."

"내가 계속 같이 할 거라는 것 너도 알 거야. 하지만 난 지금 이 상황을 좀 확실히 해야 해. 알리바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거야." 칼렙이 말했다.

아티라가 미소를 짓고 칼렙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나도 알아. 고맙게 생각해, 칼렙."

"그래. 그럼 이제 저놈의 수건이든 뭐든 좀 몸에 걸쳐줄래?"

아티라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올렸다. "알았어,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아티라는 방으로 들어가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그리고 칼렙이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개목걸이(dog tag)는 어떻게 됐어?"

"부엌에!" 아티라는 소리질러 대꾸했고 칼렙이 그곳으로 걸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아티라는 옷장 안에서 무언가를 당겨놓고는 부엌으로 갔다. 칼렙은 가만히 기대서서 작은 금속 그릇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겉 표면이 부분적으로 부식되어 버린 개목걸이 한 쌍이 담겨 있었다.

"해적이었어?" 칼렙이 물었다.

"응. 소각장에 밀어넣기 직전에 발견했어. 잘됐지, 물론. 폭발에도 끄떡없는 것들이라 그대로 두고 올 수는 없었거든. 내일 화학실험실에서 약품을 좀 가져와야겠어."

"이 자식들 대체 뭐야?" 칼렙이 반쯤은 자신에게 되묻듯 말했다. "숨어 있으려고 해봤자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않잖아. 우리 전에도 이 자식들 같은 두 놈 잡지 않았나, 지난달에?"

아티라가 말을 멈추고 생각했다. "응... 그래. 둘이었던 것 같아."

"당해도 싸지. 이해가 안 가는 건 왜 여기 나타났는데도 경관을 노리지 않았느냐는 거야.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다가는 결말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어."

"혹시... 혹시 우리가 너무 앞서간 건 아닐까?"

칼렙이 아티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아니라고?"

"이게 우리 좋자고 하는 게 아니었으면, 이런 자리는 있지도 않았을 거야. 저절로 찢겨 사라졌을걸. 나도 잘 알고 있다시피 너도 이런 탄광촌에서 일하는 사람이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살거나 가족적인 성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잖아. 이런 사람들은 고통이나 잔혹함을 느끼는 데 훨씬 강한 자극이 필요해. 보통 사람들은 너도 이해할 수 있지만, 가끔은 말이야, 하지만 이 사람들은 강하게 몰아붙이지 않는 한 알아듣지 못해. 그리고 어떤 때는 더 강하게 몰아붙여야 해. 이놈은 우리 뒤를 밟았고 널 위협하고 싸우려 들었어. 여기서 이런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 그리고 이놈, 이놈은 아무것도 아니야. 찾는 사람도 없을 거야." 칼렙은 아티라의 두 어깨를 잡고 두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마, 알았어? 그럼 눈치 채게 될 거야. 무슨 일을 했는지 얼마나 앞서갔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문제는 너의 반응이야. 절대로 움츠러들어서는 안 돼. 다 잘 될 거야. 명심해. 다 잘 될 거야."

아티라는 고개를 들어 칼렙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런 말 듣고 싶었어."

"그래. 그럼 이제 여기 남아 있어도 괜찮겠어?"

"물론이지. 그냥 이번 일이 조용해졌으면 좋겠고 그러면 다 끝날 거야."

"그래. 좋아." 칼렙이 목 뒤를 문지르며 한 숨을 내쉬었다. "이봐, 몸조심해. 난 그만 가봐야겠어. 우린 다른 어딘가에 있어야 하잖아. 또 보자."

"고마워, 칼렙." 떠나가는 칼렙에게 아티라가 말했다.

칼렙이 나가고서 아티라는 부엌 선반에 기대서 천천히 깊은숨을 들이키며 안정을 취했다. 아직도 머릿속은 우중충했지만 그래도 가장 안 좋았던 것은 쓸려 내려갔다. 칼렙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했다. 칼렙의 확고한 목적의식이 아티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 아티라는 웃음을 터뜨리며 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칼렙에게 두 번 다시 알몸으로 나타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얘기를 해 줄 참이었다. 아티라가 문고리를 당겨 문을 열어젖히기 시작했을 때, 문득 아티라는 바깥에 누가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문앞에 서 있던 다소 험상궂게 생긴 남자를 보고는 쾅하고 문을 닫을 뻔했다.

"아티라 말카넨(Malkaanen)씨인가요? 죄송합니다만 제가 방해되었나요?" 남자가 물었다.

"첫 번째는 그렇고요, 두 번째는 아니에요." 아티라가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남자는 중년의 나이에 체격이나 옷차림이 광부는 아니었고 겉보기에 악인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보니 반대인 것 같기도 했다.

"자원 조사관입니다." 남자가 말했다. "제 이름은 요한 세리스(Johan Serris)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요, 이 지역에 누수 가능성이 있어요. 누수 발생지점 찾는 것 때문에 지겹도록 돌아다니긴 했거든요. 그래서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검침기에 조금이라도 변동사항이 의심된다 싶으면 다 살펴보기로 했어요. 음, 댁에 물 새는 것 혹시 발견하신 것 있으세요?"

"샤워 중이었어요, 그것 때문일 수도 있나요?"

요한은 한숨을 내쉬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아. 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코트 밑단을 조금 만지작거리다가 스스로 멈칫하더니 재빨리 주머니 속에 두 손을 집어넣었다.

"무슨 다른 궁금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아티라가 말했다.

"글쎄요... 저도 이게 좀 성가신 일인 것은 아는데요, 잠깐 좀 둘러봐도 될까요, 대강만이라도 괜찮으니까요? 상사한테 대강이라도 조사해봤다는 말을 못하면 제 목이 달아날지도 몰라요."

아티라는 망설였다. 하지만 약간이라도 어떤 의심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것보다는 이 남자가 둘러볼 수 있게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이죠, 안 될 것 있나요." 아티라는 말 함과 동시에 이 남자가 채 움직이기도 전에 곧바로 부엌으로 걸어 들어갔다. 소리없이 살해된 자의 개목걸이를 주머니 속에 넣었다.

요한은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며 따라왔다. "상당히 깨끗하게 사시네요." 요한이 말했다.

"뭐, 여자들이 다 그렇죠." 아티라는 애써 웃음 지어 보이며 말했다.

요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요한은 아티라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다가 곧장 금속 그릇을 응시했다. 요한은 방향을 돌려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고 별달리 관심 있는 물건을 찾지 못했다. 침실 쪽을 살짝 들여다보고는 별 말없이 거실을 빠져나왔다.

"뭐, 여긴 상태가 아주 좋네요." 요한이 말하면서 손뼉을 맞부딪치고 마치 전혀 있고 싶지 않은 자리에 있는 사람처럼 크게 미소 지어 보였다.

아티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로 답했고, 문쪽으로 걸어가면서 요한이 따라오도록 했다. 요한은 아티라를 따라갔다. 하지만 욕실 옆을 지나가면서 요한이 말했다. "아, 빼먹으면 안 되지." 아티라가 채 말리기도 전에 요한은 욕실 안으로 홱 들어가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티라는 정신이 황망해짐을 느끼며 황급히 쫓아 들어갔지만 이미 요한은 굳어있었고 때는 늦었음을 알아챘다.

"이게 대체 뭐죠?" 요한이 물었다.

아티라의 머릿속에 이 보잘것없는 남자를 쥐어 채 벽으로 밀어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솟구쳤지만,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재빨리 핑곗거리를 궁리했다.

"믿을 수가 없군요." 조사관이 말했다. "전에도 여기서 빨래한 적 있으세요?"

아티라는 미소가 입에 번지는 걸 숨기려고 입술을 깨물며 동의하는 척하는 뜻으로 욕실 바닥을 내려다볼 만큼 분별력이 있었다. "... 네." 아티라는 가까스로 말했다. "네, 있었어요. 맞아요. 세상에, 황당하죠."

"말카넨씨, 제가 단연코 말씀드리는데, 이런 건 누수에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일단 아주 안 좋은 겁니다. 우린 산업용 세탁기를 갖추고 있어서 이런 빨래 정도는 순식간에 할 수 있어요. 왜 세탁기를 쓰지 않으시죠? 왜 이렇게 물을 잔뜩 낭비하는 일을 댁에서 하시는 거죠?"

요한은 말하면서 아티라를 응시했다. 요한은 그제야 뒤에 쌓여 있던 옷더미를 살펴보았고, 바로 그때 옷에서 빠져나온 가느다란 실 가닥 같은 혈흔 한 줄기가 하수구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알아챘다.

요한의 눈이 커지면서 아티라를 돌아보며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티라가 준비를 끝마쳤다.

아티라는 목소리를 조금 떨어뜨린 채 말했다. "사실, 사고가 좀 있었어요."

요한이 쩝, 하며 입을 다물었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리고서, 아담의 사과를 깨물었다. 요한이 말했다. "알았습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이제 여기서 할 일은 다 끝난 것 같군요. 어. 이런 일이 한 번 더 생기면, 그땐... 음, 아닙니다. 이제 볼일 보셔도 좋습니다.

아티라가 새침한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그럴게요."

조사관은 문을 나섰고 아티라가 곧 문을 닫았다. 아티라는 문에 나 있는 열쇠 구멍을 들여다 보고 조사관이 간 것을 확인하자 문 뒤에 기대고 서서 깊은숨을 들이켰다. 아티라는 다행히도 기꺼이 자신의 무죄를 증언해 줄 사람을 방금 하나 얻긴 했지만 그건 다소 지나치게 가까이 간 셈이라고 생각했다.

아티라는 손가락으로 다시 한번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면서 엉킨 머리를 풀었다. 언젠가는 빗을 하나 살 것이다. 어쩌면 물기가 마르면서 건조해진 얼굴에 쓸 보습제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품위를 지켜라. 모든 게 흐트러지지 않고 제대로 정돈되어 있도록 해라. 살인을 저지른 두 사람의 알리바이를 입증하려고 지금도 바쁘게 돌아다니는 칼렙처럼.

아티라는 침실로 들어가 생각에 잠겼다. 지금의 아티라처럼 다른 사람의 믿음에 호소해야만 하는 상황은 불공평했다.

아티라는 옷장 서랍 앞에 꿇어앉아 서랍을 열고 안쪽 깊숙이 손을 뻗어 신발과 외투 뒤편에 숨겨둔 작은 상자 하나를 끄집어냈다. 아티라가 그 묵직한 상자를 끌어당기자 그 안의 내용물이 짤랑거렸다. 아티라는 뚜껑을 열고 개목걸이를 나머지들 위에 얹었다.

요즘 사람들은 믿음이 지나치게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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